달리는 무릎

일러스트 정아리

달리기를 시작한 지 세 달쯤 되던 어느 날 새벽, 나는 되게 넘어졌다. 

그냥 콩 하고 귀엽게 넘어진 게 아니었다. 발을 헛디디면서 두 바퀴쯤 허공에서 구르고는 그대로 천변 아래로 처박혔다. 핑계를 대보자면 집 앞 창릉천 러닝 트랙에는 군데군데 가로등이 없는 구간이 있었고 깜깜한 그곳을 달릴 때면 나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마침 사방에 반짝반짝, 눈을 홀리는 별들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 둘까. 아무튼 왼뺨에 진흙을 처바른 채로 잠시 그렇게 누워 있었을 때는 심하게 다친 줄도 몰랐다. 그저 넘어졌구나, 그 사실만을 생각했고 그게 슬프고 창피해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평지에서 별 따위를 보다가 넘어져 여기 누운 사람은 이 천변이 생긴 이래로 나밖에 없을 것이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걸 보니 아마 후유증이 꽤 오래갈 테고 이 멍청함을 오랫동안 떠올리게 되겠구나, 곱씹으면서 마른 갈대와 썩은 들풀이 우거진 기슭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 읏쌰 하고 일어나려 했을 때 깨달았다. 오른쪽 무릎에 커다란 상처가 났다는 것을. 어두워서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손으로 만져보니 두꺼운 바지가 세로로 쭉 찢어져 있었고 그걸 자각한 순간부터 자 이제 시작, 하듯 엄청나게, 엄청나게 아팠다. 손에 척척하게 묻어나는 이것이 진흙인지 피인지 알 수 없었다. 재수 없게도 휴대폰이며 뭐며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은 터라 불빛을 비추어 볼 만한 도구도 없었고 물론 지나는 사람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픔을 참으며 마른 풀 줄기를 붙잡고 천변을 기어올랐다. 가로등이 있는 곳까지 절름거리며 이백 미터쯤을 더 걸었다. 마침내 상처를 불빛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나는 세로로 벌겋게 벌려진 무릎과 그 안의 흰 무언가를 보았고 아마도 이건 내 무릎뼈겠지, 평생 두 눈으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것이겠지. 

그때 마침 기적적으로, 등 뒤를 쌔액 하고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게 자전거를 탄 사람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나는 소리 질렀다. 저기요, 저기요오, 잠시만요, 119 좀, 119 좀 불러주세요오오오. 멀어지던 자전거 후미등의 빨간 불빛이 멈춰 섰다. 이윽고 그것이 되돌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 살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속으로 여덟 바늘, 겉으로 아홉 바늘을 꿰맸다. 꿰매는 일이야 마취 주사를 맞았으니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정말 아픈 건 그게 아니었다. 하필 진흙밭에서 구른 터라 온몸은 물론이고 상처 깊숙한 곳 안쪽까지, 참깨에 굴린 강정처럼 꼼꼼하고 빽빽하게 흙이며 먼지 알갱이가 붙은 거였다. 두 간호사가 달라붙어 한 사람은 상처를 벌리고 다른 사람은 식염수를 부어가며 안을 씻어냈다. 아프기야 끔찍하게 아팠지만 어떡해요, 어떡해요, 하며 저들이 더 미안해하는 통에 아픈 티도 내지 못했다. 식염수를 서너 통 쓰는 동안 어금니를 부술 듯 깨물며 견뎠지만 막상 상처를 살펴본 의사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러고는 내게 대뜸 선택지를 두 개 주었다. 

“지금 기적적으로 무릎뼈랑 연골은 전혀 안 다쳤는데, 안에 잔여물이 좀 남아 있을지도 몰라요. 아예 깨끗이 다 제거하려면 지금 더 큰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으면서 일일이 핀셋으로 집어내야 되고, 아니면 이대로 소독만 좀 열심히 하고 꿰매도 되고. 어떻게 하실래요?”

머리를 굴리기엔 상처가 너무 아팠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전자를 택하면 무릎뼈를 드러낸 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질 터였고 거기서도 상처를 벌리고 늘리며 온갖 고통을 당할 것이 눈에 훤했다. 게다가 핀셋이라니, 가만둬도 아픈 상처에 핀셋을 대겠다니. 

“혹시…… 꿰맸는데 안에 뭐가 남아 있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글쎄요. 일단 눈에 보이는 큰 건 거의 제거했으니 큰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은데, 정 찝찝하시면 지금 큰 병원에…….”

“아뇨, 아뇨. 꿰매주세요.”

나는 결연하게 말했다. 물론 무릎 속에 박혀 있을지 모르는 잔여물이라는 게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지금 의사가 들고 온 저 마취 주사를 당장 맞고 이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아니, 무릎을 어떻게든 빨리 처리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무릎 안에 모래든 뭐든 남으라지, 집에 가자마자 러닝화부터 쓰레기통에 처넣고 팔자에도 없는 달리기는 절대 다신 하지 않을 거야……. 

무릎을 꿰맨 뒤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른쪽 다리에 통째로 반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은 채로 절뚝거리며 방에 들어와서는 그대로 현관에 누워버렸다. 마취가 풀리는지 잠깐 사라졌던 고통이 서서히 다시 느껴지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현관 천장에 달린 센서등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곱씹었다. 늘 그랬듯, 내일 새벽엔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가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꼴을 하고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최소한 한 달은 무릎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했으니 아르바이트는 아예 쉬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고 그러면 통장 잔고가 얼마나 남았더라. 그런데 그걸 확인해보려면 저기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가져와야 했고 에라 모르겠다, 이대로 잠들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금세 고단한 오늘 하루를 끝내 줄 잠이 찾아왔고 무릎은 물론이고 온몸이 쿡쿡 쑤시고 아픈 채로 막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였다. 깁스 안쪽, 정확히는 꿰매놓은 무릎 안쪽에서 누군가 말했다.

마침내 들어왔구나.

물론 그건 잘못 들은 게 틀림없을 것이므로,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다. 

꿈에서 나는 안개가 혼곤히 낀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안개에서는 맵싸한 장작 타는 냄새가 났고 어디 먼 곳에서 누군가 자꾸 나를 찾는데, 희수야 오희수야, 하면서 내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애타게 부르는데 그게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너를 기다렸어.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기다렸어. 너희의 시간으로 사십억 년이 넘도록 여기에서 단지 너만을 기다렸어. 도무지 누군지 왜 기다렸다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 절박함만은 그대로 와닿아서 나도 울창한 나무들 사이를 헤매며 마주 외쳤다. 누구세요. 어디 계세요. 누구신데 그렇게 저를 찾으세요. 저를 아무도 안 찾은 지 좀 됐는데. 마지막 말을 하고 나서야 그러고 보니 그랬지, 생각하는데 서서히 세상이 흔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이 땅속을 뚫고 내게로 오고 있었다. 갈게, 지금 갈게. 다가올수록 목소리는 맑고 아름다워졌고 드디어 왔다, 발 바로 앞에서 불쑥 머리를 솟구치는 커다란 은빛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려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온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듯 뻐근했다. 천장에서 현관 센서등이 어제 그대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잔 것인지 창밖에서 들어온 햇살로 방 안은 희끄무레 밝아진 채였다. 그리고 무릎, 무릎이 아팠다. 아픈 무릎을 끌고 식탁으로 다가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오전 열 시, 어차피 이 꼴을 하고는 못 갔을 아르바이트였지만 지금부터 준비하고 나가도 이미 차고 넘치도록 지각이었다. 모르겠다, 냅다 전원을 끈 휴대폰을 침대에 던지고 나도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깁스를 한 다리가 답답하고 무릎은 더럽게 아팠다. 무릎에서 시작한 아픔이 손끝 발끝까지 온몸으로 번지는 것 같았다. 아프면 먹으라고 준 약이 있었던 것 같은데 택시에 두고 내렸는지 오다가 떨어뜨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와락 서글퍼서 콱 울어버릴까, 정말 울어라도볼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깁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 아프게 해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네, 제발요, 하고 말했고 그러자마자 고통은 없어졌다. 나는 조금씩 무릎에 힘을 주어보았다. 다치기 전처럼 모든 것이 제대로 움직였다. 

“뭐야 이거.” 

기쁘기보단 당황해서 소리 내어 말했고 그러자 오른쪽 무릎이 얼른 대답했다.

너를 기다렸어.

그제야 나는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꿈에서 들은 그 목소리, 먼 곳에서 나를 부르던 깨끗하고 청량한 목소리였다. 

오랫동안 기다렸어.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일러스트 정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