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의 도전: 소설가맛 쿠키편

02.

블루파이맛 쿠키

“도서관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게임을 하다보면 꼭 만나게 되는 중요한 순간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별로 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 캐릭터의 손을 놓고 강하며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더 높은 레벨로 도약할 것인지, 계속 그와 이 자리에 머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유저들은 전자를 택할 수밖에 없는데, 사람의 본성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의리가 없고 이득만 추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원래 게임의 구조 자체가 계속 새로운 캐릭터를 획득해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아이템을 구매하도록 설계되었으므로, 세계 차원의 물살에 맞서 제자리를 지키기란 쉽지 않은 터다.

물론 내가 마음이 가는 캐릭터가 아주 강하기까지 하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아주 마음에 드는 외모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능력까지 출중한 연인을 만나는 정도의 확률이라고 할까. 물론 나이가 듦에 따라 능력을 먼저 본 뒤에 외모의 애호를 스스로에게 주입한 후, 그 동행의 기쁨을 내부에서 분비해내는 쪽으로 꾀를 내게 되기도 하지만, 처음 ‘상대들의 세계’에 내던져지는 첫사랑의 시점에서는 쓸 수 없는 고급 기술인지라. 실망하고 후회하고 종래에 미안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의 공통된 추억처럼 되어버린다.

내가 처음 좋아한 ‘블루파이맛 쿠키’는 확률의 기적을 거쳐 마주한 완벽한 첫사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 블루파이맛 쿠키는 도서관 사서를 콘셉트로 하기에 보편적으로 인기를 끄는 깜찍한 생김새는 아니었으니까.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안경을 쓴 데다 성격도 무척 까탈스러웠다. 자꾸 조용히 하라고 하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고. 유저와의 호감도가 높아진 후에도 살갑게 구는 대신 감춰둔 사연과 고통을 드러내는 식으로 우정을 표하려 들었다. 하여 대개의 유저들은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지만, ‘국문학과 졸업 후 출판사 편집자로 근무하다 현재는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라는, 책으로 된 레일 위를 고장 난 급행열차처럼 달려나가고 있던 유저의 경우라면? 게다가 그 유저도 만만치 않게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여자인데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살갑게 구는 대신 감춰둔 사연과…… 이하 생략이라면? 나는 생전 웃는 바 없는 그녀를 「B사감과 러브레터」 속 여사감의 이름을 따 ‘B사감맛 쿠키’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어느 맵이든 함께 다니며 많이 플레이했다.

이 관계 밖에서 나의 자랑은 그녀가 굉장히 강한 쿠키라는 것이었다. 매우 특별하게도 다양한 능력과 효과를 혼자 다 발휘하는 욕심쟁이 쿠키였다. 변신 상태에서 점수를 얻는 피버 타임의 길이와 강도가 모두 최고 수준이었을 뿐 아니라 한 번 죽은 뒤에 본래 체력의 반 정도 되는 체력으로 부활까지 했다. 중간중간 엄청난 속도로 달리거나 날며 눈앞에 있는 장애물을 모조리 박살내기도 했다. 어떤 유저든 젠더와 연령에 관계없이 블루파이맛 쿠키와 함께 달릴 때 가장 높이 성취할 수 있었다. 가장 크게 환호할 수 있었다. 현실 속 지루하고 무능한 자신의 일과를 잠시간 짜릿하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내 느낌에 그 쾌감은 술이나 담배보다도 강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백일 붉은 꽃 없다고 하던가. 또 새로운 쿠키들이 출시되고, 쿠키들의 능력치 재조정이 반복됨에 따라 영원할 것 같던 블루파이맛 쿠키의 시대도 저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거의 미련 없이 다른 쿠키로 옮겨가는 것 같았다. 멋진 중세시대 기사 차림을 한 ‘라즈베리맛 쿠키’나 외모 투표 1위에 빛나는 ‘달빛술사 쿠키’ 때처럼 뭉그적거리며 이 조합 저 조합으로 어떻게든 능력치를 유지해보려는 시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결국 이 거지같은 오븐에 블루파이맛 쿠키와 나, 단둘만 남았다고 느껴지는 시점에 이르자 생각이 복잡해졌다. ‘실리 추구보다는 즐기자 주의로 플레이합니다’라는 우리 길드 모토에 따라 나도 더 높은 레벨, 더 높은 점수만을 목표로 이 게임에 임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원한다면 그녀 곁에 더 머물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고수의 반열에 들어 금고에 은화며 다이아가 넉넉했으므로 생계를 위해 아등바등 매 경기를 이 악물고 달려야 하는 처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이제는 나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그녀가 바라고 있다는 느낌. 자기 곁에 남은 마지막 유저인 나를 마침내 떠나보내기를, 그녀가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고.

왜냐하면 그래야 다시 혼자 남을 수 있으니까.

“저는 아주 오랫동안 혼자 있었습니다.”1 블루파이맛 쿠키는 많은 대사를 가진 편이지만, 내 기기에서만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저 말을 가장 자주 했다. 나는 블루파이맛 쿠키의 말풍선에 저 문장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가 마침표 뒤에 감춘 말들을 궁리하게 됐다. 그게 재미있었던 이유는 “아주 오랫동안 혼자 있었”으니까 이제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연결도 성립이 되고, 끝까지 혼자 있도록 내버려두라는 연결도 성립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마음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고립자의 본질임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다른 대사들에 따르면 그녀가 있는 도서관의 사서는 그녀 혼자고 그녀는 절대로 “이 도서관을 나가지 않”는다. “책을 읽을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이는 그녀가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그녀의 도서관은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며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더 나은 일들도 있”지만 그녀가 자신을 획득한 유저에게 처음 건네는 말은 이것이다. “이 도서관에서 제가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어릴 적 어른들은 나에게 ‘넌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니 도서관 사서가 돼라’ 하고 말하곤 했다. 도서관 사서가 되면 평생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열 살쯤 먹었을까, 그 말을 들은 내가 즉각적으로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평생’이라는 말이 두려웠다. 내가 읽어온 수많은 이야기에 따르면 무언가를 ‘평생’ 해야 한다는 건 저주였다. 평생, 영원히…….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소용없었다. 어른이 된 내 모습이 번개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사라졌다. 안경을 쓴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구역질 나게 싫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내게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나만이 길을 아는 미로였고 호의적인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과 같았다. 괴롭히는 친구들을 피해 서가로 들어가면 그들은 나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고 돌아갔는데 여기서 나를 찾는 게 불가능함을 이미 학습했기 때문이었다. ‘괴롭히는 친구들’에는 세상 어린이 전부가 속했다. 내게 말을 걸거나 나를 쳐다보거나 놀자고 제안하거나 과자를 나눠주는 것 따위 모든 행위가 내게는 괴롭힘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 그 애들이 꺼림칙했던 것 같다. 그 애들이 어린 사람이라는 게, 내가 그 애들과 다를 바 없는 어린 사람이라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내가 트렌스젠더의 유년기 경험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내가 어른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내 부모보다 똑똑했고 선생보다 아는 게 많았다. 선생님이 초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어떤 지식을 설명할 때에 나는 그 노래와 율동과 꾸며낸 목소리와 조잡할뿐더러 잘 대응되지도 않는 은유들을 증오했다. 바로 답을 쓸 수 있는데도 칠판에 줄줄 적어대야 하는 풀이 과정, 그냥 그런 것인데 굳이 설명해야 하는 언어적 뉘앙스, 어른이 해준 게 분명하다며 상 대신 벌을 주던 숙제들, 그래서 억지로 배우고 흉내 내야 했던 ‘어린이’의 태도나 수준 같은 것. 나는 이게 나에게 가해지는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선생님들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할머니를 가르친 선생을 낳은 어머니를 가르친 교수라고 생각했다. 그 교수는 영의정의 복식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블루파이맛 쿠키를 이해하고 그녀와 공명할 때 나는 그녀의 안에서 바보가 되는 데에 실패한 유년기의 내 모습을 봤다. 그런 이해 혹은 오해를 바탕으로 그녀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너는 전혀 어른이 아니며 모르는 것이 많고, 네가 ‘바보같은 짓’이라 여기는 그 일이 너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다 거짓말인데 굳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해줘야 하는 이유는 그녀가 하루빨리 그 도서관에서 나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인터뷰어는 내게 문학만이 가진 매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전혀 모르겠다고 답했는데 실은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나는 문학만이 가진 매력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보다 열 살이 어린, 내 소설들을 재미있게 읽었다며 방긋방긋 웃는 인터뷰이 면전에 그런 말이나 들이미는 선배는 되지 않고 싶었으므로 나는 최근 빠져 있는 주제인 늪 얘기를 꺼냈다. “그냥 어떤 동물들은 어떤 특수한 늪에서만 살 수 있듯이 사회에도 어쩔 수 없이 문학에 젖은 채로 살게끔 되는 사람들이 있는 거 아닐까요. 빠져 죽지도 말고 말라 죽지도 말고 적당히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숨 쉬어야겠죠.”

“함부로 마도서를 만졌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블루파이맛 쿠키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그녀가 관리하는 도서관에는 ‘저주받은 마도서’가 한 권 있었고, 그녀는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읽는 과정에서 마지막 도서인 그 마도서를 읽게 된다. 이로 인해 저주에 걸려 도서관에 평생 묶인 존재가 된 그녀는 다른 존재들로부터 그 도서관을 지키는 동시에 그 도서관으로부터 다른 존재들을 지키려 한다. 그것이 그녀가 그렇게 날카로운 이유다.

어쩌면 모든 책의 목표는 그 마도서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단 한 권의 책이 되는 것. 그리고 실제로 어떤 이들은 마도서를 만난다. 마도서는 그들을 늪으로 데리고 가며, 늪은 그들을 숨 쉬게 한다. 그들을 비로소 살 수 있게 된다. 늪가에서.

블루파이맛 쿠키의 도서관에 마도서 따위는 애초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저주 같은 건 전혀 없고, 모든 책은 재미가 있거나 없었으리라. 그러나 모두 “저마다의 가치가 있”었으리라. 블루파이맛 쿠키는 거기 자신을 숨겨두었다. 다른 존재로부터 지키고 싶었던 건 도서관이 아니라 본인이었을 수 있다. 그리고 본인으로부터 다른 존재들을 지켜야 한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속상해진다. 저주는 없고, 그냥 블루파이맛 쿠키뿐이라니. 마귀 들린 책 같은 건 없고 그냥 도서관에서 평생을 보낸 블루파이맛 쿠키뿐. 도서관을 사랑하면서 도서관을 떠나고 싶어 밤이면 책들을 등진 채 창밖을 내다보는 블루파이맛 쿠키뿐. 그게 전부였다면…….

나는 언젠가 블루파이맛 쿠키가 도서관을 떠났으면 좋겠다. 내가 블루파이 쿠키를 위해 블루파이 쿠키를 떠났듯, 블루파이 쿠키도 도서관을 위해 도서관을 떠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상상한다. 그때 나는 블루파이 쿠키가 도서관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버리기를 바라는데, 그런 방식으로만 그녀는 도서관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나는 블루파이맛 쿠키가 자기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다 터뜨려버렸으면 좋겠다. 책장과 책상과 책받침과 책갈피 들을 부수고 검은 밤하늘로 스스로를 쏘아올렸다가 아 맞다, 잊은 게 있다며 뒤돌아 건물의 기둥들을 하나하나 절단내면 좋겠다. 이미 곤죽이 돼 전혀 가망 없는 건축물에 굳이 불까지 질러 소각하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만 그녀는 도서관을 떠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주받은 마도서’의 저주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으나 높은 확률로 블루파이맛 쿠키는 도서관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 사실을 단 하나의 쿠키만 알고 있다면 그건 바로 블루파이맛 쿠키 자신일 것이다.

늪에 빠지면 누구든 나오고 싶어 한다. 그건 늪에서 태어난 동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제까지나 머무를 수 있는 터전은 없다. 우리는 모두 허물을 벗는 동물이다. 텅 빈 건물을 등지고 철문을 빠져나오면 바람이 닿는 무른 몸에서 비로소 성장통이 시작된다. 그것을 바란 적 없다 외친들 소용없다. 허물이 그것을 바라고 있다. 허물은 고독을 원한다. 그러나 당신을 품는 동안 행복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더 단단히 버텨 성장을 방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허물이 허물이 된 게 바로 그 때문임을 허물은 모를 것이다. 탈피가 자신에게 부여된 상인지 벌인지를 한가롭게 고민하느라, 기실 작별이라는 사실은 영영 모를 것이다.



  1. <쿠키런 오븐브레이크>에서 ‘블루파이맛 쿠키’의 대사 중 하나. 이하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