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의 도전: 소설가맛 쿠키편

03.

양파맛 쿠키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사실 쿠키런 세계관의 그 어떤 쿠키도 실존 인물과 일대일 대응하지는 않는다.

양파맛 쿠키와 우지안만 빼면.

양파맛 쿠키가 지안의 앞에, 아니, 모두의 앞에 나타난 것은 바야흐로 우리 길드 ‘대장을 따루라’가 전성기를 누리던 2020년의 일이다. 길드 등급은 지금이 더 높지만 그때는 감정적으로 넉넉했었다. 처음 이 길드를 만들고 길드장 자리에 오른 이는 지안의 동생이었고, 부길드장으로 임명된 나를 포함한 다른 길드원들은 더러 모르는 사이도 있었지만 전부 지안의 친구였다. 지안은 이 거대한 집단의 핵으로 위치하는 동시에 본인은 쿠키런을 하지 않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건 꽤 효과적이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자꾸만 지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길드 캠프에 피워진 가상의 모닥불 주위에 각자 좋아하는 캐릭터 모습으로 둘러앉아 인사를 나누고 나면 자연스레 지안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그리움은 좀 이상한 정취를 자아냈기 때문에 실제 현실에서 지안과 같은 방에 앉아 게임에 접속하고 있는 사람도 그것을 느끼게 되곤 했다. 그러다보면 지안은 다른 시공간에 속한 신적 인물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제우스나 마리아보다는 아무래도 설문대 할망이나 아기 장수 우투리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양파맛 쿠키는 아기 예수처럼 찾아왔던 것 같다. 양파맛 쿠키는 어렸고, 작았고, 늘 울었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되게 가여웠고 그 괴로운 몸 안에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품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를 구세주처럼 느낀 건 꼭 양파맛 쿠키와 꼭 닮은 친구를 현실에 둔, 그리고 그에게 제각기 마음을 빚진 바 있는 우리 길드원들뿐만은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가장 열광한 것은 역시 우리들이었을 것이다. 축 처진 입꼬리와 눈꼬리, 흰 파자마를 입은 채 울고 있는 단발머리 여자애. 다른 쿠키들은 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길을 혼자서만 울며 뭔가에 쫓기듯 도망을 치고 있는데 가만 보면 그 속도가 전혀 뒤처지지는 않는, 이상한 아이.

본디 달리기 게임은 많이 있어왔고 지금도 출시되고 있지만, 쿠키런 오븐브레이크가 많은 유저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정교하고 흥미로운 세계관에 있다. 쿠키런 세계관의 개성은 해당 세계 속 다양한 캐릭터 간의 관계에서 온다. 양파맛 쿠키는 주변의 거의 모든 조각과 연결되는 단 하나의 퍼즐 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마도 양파맛 쿠키 전에 존재해온 쿠키들 대부분이 거의 울지 않는 캐릭터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용감하거나 씩씩하거나 쾌활하거나 낙천적이지 않더라도 복수심에 들끓거나 분노를 표출하거나 악의 기운을 피워내는 쪽이었지 구슬프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캐릭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양파맛 쿠키는 쿠키런 세계관의 예수 같은 거라고 나는 혼자 생각하곤 했다. 모든 쿠키 캐릭터들이 조금씩 나누어 가졌어야 하는 슬픔들을 양파맛 쿠키 혼자서 모두 떠맡았다. ‘게임’이라는 세계 속 대속자. 오멜라스의 아이. 실제로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런 역할을 맡도록 설계된, ‘우는 존재.’

캐릭터 설명에 따르면 양파맛 쿠키가 계속 우는 이유는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으로 나뉜다. 외적인 요인은 양파맛 쿠키의 머리카락이 양파 껍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계속 눈이 따갑다는 것이다. 내적인 요인은 ‘유령’에 대한 감정들이다. 단순히 유령을 무서워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 실은, 양파맛 쿠키 자신도 유령이기 때문이다.1 오래전 죽음을 맞이한 이 인물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자신이 저택을 돌아다닐 때 일어나는 심령현상에 놀라며 괴로워한다. 그는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고, 그 고독에 관해서도 외로움뿐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는데 이는 자신이 혼자 있기 때문에 유령이 자신을 찾아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파맛 쿠키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다 어디 간 거야……?” “혼자 있는 건 무서워…….”

그 외의 대사는 대부분 우는 소리였기 때문에 2022년 12월 ‘메리베어 장난감 가게의 특별한 손님맞이!’ 이벤트가 시작되고 양파맛 쿠키가 새로운 대사를 보여줬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양파맛 쿠키는 장난감 가게에 찾아와 내가 만든 곰 인형을 내려다보며 분명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외로워 보여…… 내 인형이랑 친구 할래……?”

“울었어? 슬퍼 보여.”

지안과의 첫 만남에서 지안은 내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걸었던 것 같다.

“나 너 알아.”

대뜸 이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너 모르는데.”

나는 솔직한 편이었다.

“도화살 메이크업인데.”

상대적으로든 절대적으로든 사회성이 부족하기도 했다.

“나는 예전에 너 본 적 있어.”

지안은 굴하지 않고 내가 눈가에 바른 붉은 섀도를 자세히 보려는 듯 다가오기까지 했다.

“언제?”

나도 기억을 되짚어보며 물었다.

“네가 엄청 울었을 때.”

거기까지 들은 나는 아, 하고 숨을 탁 내뱉었다. 그 날숨이 한숨이었는지 실소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나는 그해에 정말 많이 울었다. 연극반 무대에서였는데 내가 감당하기 버거운 역할을 맡았던 것 같다. 자식이 죽은 엄마였다. 그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어 울고 감당하기 힘들어 울다가 종래에는 우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우는 날의 반복이었다. 그 뒤 휴학을 했고 몸 여기저기를 다쳤다. 그리고 복학 후 들어간 무용 동아리 첫 연습 날에 지안은 내게 그 연극을 봤다고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싸늘해지려는데, 뭔가 반짝였다. 지안의 눈에 눈물이 고여들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무 명가량의 동아리원들이 쳐다보든 말든, 지안은 더 울먹이고 있었다. 슬펐다고 했다. 나를 보면서, 저 사람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 슬퍼 보인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연극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그게 집중한 거 아니에요?’ 물어보고 싶었는데 질문을 애써 삼키자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지안도 따라 웃었다. 그런 식으로 그때의 울음은 수습되었다.

그 뒤로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지안이 우는 모습을 셀 수 없이 많이 보았다. 희노애락애오욕, 그 무지개의 일곱 빛깔뿐 아니라 사이사이의 모든 스펙트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지안의 눈을 젖게 만들었지만, 지안이 목과 가슴을 적실 만큼 큰 울음을 우는 경우는 따로 있었다. 지안이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이의 억울함을 알릴 때,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촉구할 때, 수없이 많은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독재자의 탄핵과 처벌을 부르짖을 때 지안은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지안은 꼭 울기 위해 광장으로 향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울음에 등 떠밀려, 뒤쫓아오는 울음에 쫓겨 도망치는 사람처럼. 그 뒤로도 우는 지안은 계속 달렸다. 공장에서, 이태원에서, 가자 지구에서, 오늘 죽은 이들이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사회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슬픔을 유보할 때 지안은 그렇게 한 적 없었다. 슬픔이 지안을 유보했다. 유보된 지안을 보살피는 친구들은 전부 언젠가 지안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은 적 있는 이들이었다. 그때 지안이 가누지 못하는 지안의 큰 울음은 친구들에게 묘한 안심으로 다가오기도 했던 것 같다. 지안의 안에서 배출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저 방울들 안에 차곡차곡 담겨 있을 것 같아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안이 ‘이번만큼은’ 울지 않기를 헛되이 바라기도 했다. 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내 소설 『단명소녀 투쟁기』를 각색한 연극이 무대에 올랐을 때, 연출을 지안이 맡았다. 대본으로 각색하는 일은 지안과 내가 오랜 시간에 걸쳐 공들여 했다. 처음 모든 스태프가 모여 회의를 하던 날에 대본에 관한 질문이 하나 나왔다. ‘운다’는 지문에 대한 것이었다. 그게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주인공 ‘구수정’은 강한 여자애인데 왜 계속 우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양파맛 쿠키를 아시나요?”

옆에 있던 지안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려 내게 눈치를 주었다.

“아……. 혹시 민달팽이를 아시나요?”

나는 말을 바꾸어 다시 물었다. 민달팽이란, 껍데기가 없는 달팽이를 말한다. 점액을 분비하거나 느리게 잎을 갉아 먹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달팽이라는 생물은 굉장히 연약하다고 여겨지곤 하고 실제로도 연약한데, 껍데기마저 없는 달팽이라면? 하지만 지안과 나는 언젠가 그런 결론을 내린 적 있었다. 지구가 멸망하는 그날이 오면, 마지막으로 살아남는 생명체는 민달팽이일 거라고. 폐허가 된 세상, 단단한 껍질과 커다란 몸집과 날카로운 이빨과 날쌘 근육 혹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가진, 아니, 가졌던 시체들 사이를 단 한 마리의 민달팽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지나가며 “앗…… 지나갈게요…….” 말하는 풍경이 지구의 마지막 장면이 될 거라고. 그 생존에는 물론 운이 크게 작용하겠지만, 너무 작고 너무 가볍고 너무 물렁물렁하기 때문에 모든 고체화된 재앙과 불행의 ‘틈’에 위치하게 된다는 물리적 가설이나, 삶과 죽음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너무 많이 모호해서 크게 다친 상태로 영원히 살아 있게 된다는 양자역학적 가설, 민달팽이의 위치가 생태계에서 너무 하부에 있다보니 모든 것에 대한 접근성이 너무 떨어졌고 마침내 종말에 대한 접근성도 떨어져서 사실 이 민달팽이는 종말이 온 것도 모르는 상태라는 사회학적 가설 등 많은 증거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강한 사람은 원래 좀 약해 보이고 실제로 약한 기질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다’라거나 ‘적어도 그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유의 아포리즘이었지만 나는 짧은 순간 나를 보는 눈빛들의 생경함을 감지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었다. 나는 내 마음을 잘 설명해야 했다. 구수정이 강한 사람인데 많이 우는 이유를 최대한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 나는 여러 예시를 더 가지고 왔다. 안미옥의 시 「생일 편지」2도 그중 하나였다.

“발이 더 무거워졌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너는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이 구절을 어떻게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구절을 쓴 메모지를 손에 든 채 덜컥 겁에 질렸던 기억. 이걸 다 말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지안이 아닌 사람들이 다 유령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외로움과 두려움과 슬픔이 서로 다른 컵에 담긴 물과 같음을 깨닫게 됐다. 나는 지안 없는 내가 지상에서 얼마나 혼자일 수 있었는지 갑자기 알았다. 지안이 종종 내가 없는 세상을 가정하며 울음을 터뜨린다고 말할 때, 그 기절초풍할 무서움과 서러움을 이해하게 됐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결심했던 것 같다. 언젠가 꼭, 쟤가 죽은 모습을 보자고.

지안이 내 죽음을 겪지 않을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절대로 쟤보다 먼저 죽어버리면 안 된다는 각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는 지안의 죽음을 겪어야 한다. 하지만 결국 내가 지안에게 반드시 그걸 해주게 될 것이라는 예감까지도 나는 그 찰나에 하고 말았다. 그건 우리 사이의 마지막 양보가 될 거다. 내가 져줄 거다. 내가 한 살 언니니까, 하는 타당한 이유까지도 재빨리 생각해내고야 말았다.

그러니 미래라는 것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원래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훨씬 더 그렇다.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을 걸어보곤 하는 일도 있다. 최근 이름을 ‘지안’이라고 지은 아기가 많아지고, 주변에서 지안으로 이름을 바꾼 성인들도 심심치 않게 목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나의 지안은 달가워하지 않지만 내 마음속에는 비밀스러운 끄덕임이 있다. 세상에 지안이 많아지면 용감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 거라는 믿음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지안이 필요하다고나 할까. 계속 지안이 필요하다고 할까. 나에게는 그렇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지안이다. 지금 내가 가진 지안이 아닌 모든 것은 언젠가 지안과 함께 왔다.

이 글을 쓰며 찾아본 양파맛 쿠키의 짝꿍 펫 ‘양파 물고기’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았다. “언젠가 양파맛 쿠키가 펑펑 울어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을 때 그 안에서 헤엄치던 물고기.” 혹시 여기까지 읽고 양파 물고기의 공감 능력에 의문과 충격을 표하는 이들이 있다면 유감이지만 여러분은 아직 우정을 모르는 거다. 곁에 있는 소중한 이가 펑펑 울어 세상을 눈물바다로 만들어버렸을 때 그의 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직접 물고기가 되어 그 바다를 헤엄치는 일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아직 모른다는 거니까. 양파 물고기는 “눈물 속에서 헤엄치는 걸 좋아”하는 나머지 “수분이 부족할 때는 사방팔방에 양파즙을 흩뿌려 그게 뭐가 되었든 눈물을 쏙 빼놓는” 능력마저 발휘한다. 이때 양파 물고기가 자신의 즙을 짜 뿌리면서 눈물을 빼놓는 대상은 양파맛 쿠키를 뺀 모든 것이다. 그러니까 양파 물고기는 자신과 양파맛 쿠키가 울면서 길을 갈 때 주변에 있는 존재들도 전부 다 울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애다. 나는 이 점에서도 양파 물고기를 높게 평가한다.

어떤 이가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는 ‘무섭기 때문에 끝까지 걸어가는’ 존재다. 그의 달리기는 완주 없는 도주다. 도주범이 도주할 때 두 명의 감시관이 그를 쫓았지만 결국 놓쳤다는 뉴스를 보며 옆에 있던 사람은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원래 도망치는 사람은 쫓는 사람이 절대 잡을 수 없대.” 내가 왜냐고 그 원리를 묻자 그는 먼 곳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그렇대…….” 그러나 나는 이 현상의 원리를 바로 알 것 같았다. 그건…… 그냥 그런 것이다. 두려움은 그만큼 큰 힘이다. 그걸 누군가 발휘하기 시작했다면 ‘정의감’ 같은 걸로는 상대가 안 된다. 민달팽이의 생존에는 논리가 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종말한 세계의 민달팽이. 최후의 생존자 민달팽이. 이 개념은 무척 흥미롭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상상하게 된다. 두려워하며 최대 속력으로 도망치는 민달팽이는 천천히 어딘가에 다다른다. 숨을 껍데기가 없는 가여운 민달팽이에게 만물은 기꺼이 껍데기가 되어 준다. 하지만 민달팽이는 바로 그 껍데기들도 두렵기 때문에 한 번도 숨지 않고 전진만 한다. 어느 순간 민달팽이는 처음 느껴보는 고요함에 멈추어 주변을 둘러본다. 두려워할 존재가 모두 사라졌음을 깨달은 민달팽이는 곧 새로운 두려움에 휩싸이는데, 그것은 다른 껍데기에 담긴 외로움이다. 민달팽이는 슬피 울기 시작하지만, 막 바다 같은 걸 이루기에 그의 눈물방울은 참 작다. 하지만 민달팽이의 작은 눈물단지는 결코 마르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꽤 흐른 뒤 마침내 작은 웅덩이 하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거기서 양파 물고기가 태어난다.

“나 너 알아.”

차츰 울음을 그치며 민달팽이는 말한다.

“나는 너 모르는데.”

양파 물고기는 솔직한 편이다.

“예전에 너를 본 적 있어.”

민달팽이는 굴하지 않는다.

“언제?”

양파 물고기가 묻는다.

“네가 엄청나게 울던 날.”

그 말을 들은 양파 물고기는 부끄러워져서 사방팔방에 양파즙을 막 뿌려댈지도 모른다. 눈이 매워 바람도 구름도 눈물을 흘리고, 축축해진 땅에서 새싹들이 울며불며 태어나는 가운데 민달팽이만은 웃음을 터뜨리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결말이다. 누군가 이 이야기를 듣고 민달팽이의 공감 능력에 의문과 충격을 표한다면 그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다.



  1. 유저들이 여러 증거를 찾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는데, 2023년 여름 김으로 된 부적을 던지는 퇴마사 콘셉트의 ‘김맛 쿠키’가 출시되어 양파맛 쿠키에 관해 “가끔 자기가 유령인 걸 모르는 유령들도 있지”라고 밝히는 대사가 공개되며 확정되었다.
  2. 안미옥, 「생일 편지」, 『온』, 창비,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