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블 리포트

2022년 8월 8일은 근대적 방식의 기후 관측이 시작된 이후 115년 만에 서울에 가장 많은 비가 내린 날이다. 8월 8일부터 사흘간 내린 폭우로 인해 14명이 죽고 26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기록은 일기 예보에서 장마 대신 우기와 건기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기까지 깨지지 않았다. 덕분에 한반도의 기후 변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해당 기록은 여전히 기념비적인 상징성을 가진다. 요즘 우기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강우량이었는데도 말이다. 또한 2022년은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이 완화되고 단계적 일상 회복이 진행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8월은 코로나바이러스의 11번째 변이인 오미크론의 유행이 끝나 가던 무렵으로, 이상기후 담론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잔뜩 높아진 대중의 신경 역치를 자극할 만한 새로운 걱정거리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한국 생태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남게 될 일은 정작 인천의 한 외딴 해변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에 관한 보도는 현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질학자 겸 저술가로 활동하며 김포가 서울시에 편입되는 데 일조한 김상덕 씨는 그날 일어났을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1992년 난지도가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정부는 당시 김포군에 서울특별시와 인천직할시, 경기도가 공동으로 사용할 광역 쓰레기 매립지를 조성했습니다. 당초 2016년까지 사용될 예정이었던 해당 매립지는 대체 지대를 찾지 못해 2025년까지 사용 기한이 연장되었습니다.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했고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보상 문제들도 많았습니다만, 실은 중요한 운영상의 문제도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2018년입니다. 당시까지 사용하고 있던 2 매립장은 1월에 포화 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3 매립장이 아무리 서둘러도 7월 이전에는 운영을 시작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즉, 5개월가량의 매립 공백이 불가피했습니다. 거의 허리띠를 졸라매다시피 진행한 매립 효율화 작업 덕분에 실제로 공백이 그만큼 길어지지는 않았습니다만, 하필 그맘때쯤 중국에서도 쓰레기 수입을 금지해 버리는 바람에 많은 쓰레기가 사실상 임시로 매립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임시 조치’된 쓰레기들은 나중에 3 매립지가 가동을 시작하면 그때 옮겨 묻을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 일이 그렇게 되나요. 그 사이 담당자가 바뀌고 임시 매립이 있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기억하는 직원들 역시 다른 근무지로 발령받게 되면서 그 ‘임시 조치’는 까맣게 잊혔습니다. 자료 청구를 해 보면 확인할 수 있는데, 만약 그 임시 매립 쓰레기들을 제대로 처리했더라면 해당 사항은 업무 기록에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합니다.”

녹색 환경부의 10년 치 전자 공시 데이터를 확인해 보면 실제로 ‘불법 매립’ 혹은 ‘임시 매립’ 같은 말은 보고서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등장할 때조차 이를 방지하는 방안에 관한 내용만 나온다. 해당 전자 공시 데이터를 수집한 스파이더 R7-V의 메인 보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조직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문제는 언제나 방치되거나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한다.” R7-V를 운용하는 환경 단체 ‘세이브 더 쇼어(Save The Shore)’의 인터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쓰레기를 매립할 때는 하루에 3,300톤가량의 침출수가 발생합니다. 부패로 유독 가스 또한 발생하지요. 2000년대경부터 국내에도 도입된 친환경 매립지는 위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안점을 둡니다. 침출수는 탈리액을 이용한 특허 기술로 처리해 2급수로 방류하는 것으로, 매립 가스는 발전소에서 태워 전기 생산에 활용하는 것으로요. 그런 과정 덕분에 옛 매립지 위에 생태 공원이 조성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2022년에 아직 매립이 끝나지 않은 3 매립지에도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꾸준히 제기되던 악취 관련 민원만 봐도 쓰레기들을 완전히 묻어 버린 뒤가 아니라는 건 명확합니다. 2022년 8월 8일부터 사흘간, 인천에도 역시 서울 못지않게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침출수의 유출에는 종종 폭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비닐로 묶은 음식물 쓰레기를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리 꽉 묶었다고 해도 물웅덩이에 던져 넣으면 샐 겁니다. 높은 곳에서 던졌다면 터질 수도 있죠. 수년간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썩고, 농축되어 온 오염 물질들이 그날의 비로 유출되어 블랙번으로 흘러 들어간 겁니다.”

블랙번이 몇 달만 더 일찍 발견되었더라면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었을 거라고 열변을 토한 후 고선경 씨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녀는 ‘세이브 더 쇼어’의 열광적 지지자로, 대학에서 생태학 교수직을 맡고 있다. 인터뷰 중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손수 역학 조사팀을 꾸려 블랙번에 갔던 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두꺼운 회백색 방호복을 입은 대학원생들이 블랙번 해변을 파헤쳤을 때, 침출수의 증거인 유해 화학물질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고선경 씨는 믿기지 않아서 계속 파라는 지시를 내렸다. 표적 물질이 간이 검사로 확인 가능한데도 다른 팀에 손을 벌리지 않고 직접 블랙번까지 온 고선경 씨였다. 음모나 중상모략도 아닌 오답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결론이 아니었다. 구멍을 팔 때마다 올라오는 역겨운 냄새가 그녀의 가설을 지지하는 것 같아 가슴이 부풀었지만, 검사 결과는 매번 음성이었다. 10번째 검사지마저 아무리 노려봐도 붉은 선을 드러내지 않자 우직한 김포 여인 고선경 씨조차 대학원생들의 눈치를 보며 철수하자고 중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때의 학생 중 하나가 블랙번에 터를 잡아 버리는 바람에 고선경 씨는 녹색 환경부 자문 위원 자리에서 하차해야 했다. 어쩌면 그녀가 유해 물질의 부재를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라며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그때의 아쉬움을 기억 속에 제대로 묻어 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블랙번의 암모니아 질소 수치와 페놀 수치는 비정상적으로 낮았습니다. 도시의 아무 흙이나 퍼다가 측정한 것보다 더요. 분화구나 심해처럼 극단적인 환경에도 생태계가 형성되듯 블랙번에는 침출수를 양분 삼아 살아가는 생물들이 나타나 오염 물질들을 먹어 치워 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아직 우리가 그 증거를 찾지 못했을 뿐이죠. 블랙번이 조금만 더 빨리 발견되었더라면 분명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여전히 매년 10여 편의 논문을 내는 고선경 씨의 미간에 빗줄기처럼 가는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그 열정이 무색하게도 고선경 씨의 주장은 학계의 주류 의견이 아니다. 대부분 학자는 블랙번에서 일어난 일을 단순히 환경 오염에 의한 것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들이 지적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쓰레기로 인한 문제가 현대에 새롭게 대두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인간이 도시를 이루고 살면서부터 쓰레기는 늘 골칫거리였다. 조선 시대의 기록물들을 살펴보면 성안에서 나오는 재나 분뇨 등을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없어 청계천이나 길가에 그대로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천이 막히고 똥물이 우물을 더럽히고 길가에 재가 날리는 건 예삿일이었다. 위생 불량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1896년 5월 2일 자 독립신문에는 “지금 서울에 있는 우물물을 분석해 보면 그 물이 물이 아니라 거름을 거른 것이니 이런 물을 먹는 까닭에 여름이면 설사로 죽는 사람이 많이 있고, 열병과 학질이 많이 도니 백성이 병이 많으면 나라가 자연히 약해지는 것이라.”라고 쓰인 기사가 실려 있다.

녹색 환경부 소속 싱크탱크의 대변인이 유튜브 채널을 통해 밝힌 입장도 들어봄 직하다. 재활용 직물로 만들었다는 초록 새싹 모자를 쓰고 등장한 대변인은 “물론 쓰레기의 양과 종류가 현대에 와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사실이며, 전에 없던 문제들을 초래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수도권 매립지의 쓰레기들은 대부분 생활 쓰레기다. 거기서 연유하는 오염이 종래에는 없던 새로운 사태를 촉발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가설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 영상을 보고 알 수 있는 건 정부와 주류 학계가 블랙번 문제를 아주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뿐이었다.

해당 영상은 누적된 신고로 인해 현재 유튜브에서 삭제된 상태다. 지금은 인터넷 아카이빙 페이지를 통해 몇몇 댓글만 확인할 수 있는데, 그중에 블랙번 사태가 북한에 의한 생화학 테러라고 주장하는 댓글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그러나 감염 경로부터 증상까지 모든 것이 의미 불명인 블랙번 사태로 북한이 도대체 뭘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생화학 테러설은 그다지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블랙번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블랙번 사태가 발생한 것은 2022년의 폭우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였다. 그 사이 틱톡에서 시작된 숏폼 동영상 콘텐츠 유행이 한국에서도 무르익었고, 한국의 연간 출산율은 0.4 아래로 떨어져 국제 애널리스트들은 한국의 자연 소멸이 몇 세대 남지 않았다며 한국에 대한 투자 리스크를 경고하는 리포트를 찍어 댔다.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대대적인 이민 정책을 추진하면서 “노동자가 아니라 새 가족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는데, 그 문구야말로 당시 상황의 절박함을 잘 드러내는 것이었다.

버저비터는 그런 상황이 자기에게 기회가 될 거라고 여겼다. 그는 한국에 사는 말레이시아 남성으로 2021년부터 서울특별시를 탐방하는 영상 시리즈를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그는 서울 각 동의 매력적인 역사를 설명하는 자기 콘셉트에 큰 희망을 걸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여행을 다니지 못하는 이들에게 소위 ‘랜선 여행’의 수요가 있으리라고 믿은 것이다. 실제로 그 가설은 옳았다. 그러나 5차 이상의 방정식에 근의 공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 이상으로 복잡한 문제는 문제를 푸는 방법을 아는 것과 별개로 해결되지 않기도 한다. 버저비터의 문제는 바로 그런 속성의 문제였다.

버저비터의 동영상들은 처참한 조회 수를 기록했으며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은 일 역시 없었다. 버저비터 채널의 구독자는 300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30명 정도는 영상마다 외국어로 낯 뜨거운 응원 댓글을 달아 대는 가족과 친지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018년 북한에 다녀온 네덜란드인으로 유명한 구독자 20만 명의 유튜버 아이고바트가 2022년 9월부터 같은 콘셉트의 콘텐츠를 시작하면서 그의 희망은 폭우에 쓸려 내려가는 페인트처럼 옅어지고 있었다.

 서울에는 426개의 동이 있다. 블랙번이 발견되기 전날, 버저비터는 200번째 동에 방문했다. 코로나는 박멸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고, 경쟁하듯 해외여행을 떠났던 이들도 슬그머니 일상으로 돌아온 이후의 나날이었다. 버저비터는 무언가 흥미로운 것이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하지만 눈에 밟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할 말이 있느냐는 것과 찍을 만한 게 있느냐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고 자꾸 얽혔다. 자기 혼자만 지나간 시절 아래 묻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야깃거리가 많은 동네는 거의 다 돌아본 후여서 그의 콘텐츠 역시 이제 끝을 보이고 있었다. 문제를 너무 많이 풀다 보니 문제들이 다 거기서 거기로 비슷해 보이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지겹도록 익숙했지만, 문제를 풀어내지는 못한다는 점까지도.

그날 저녁 맥줏집에서 버저비터를 만났다는 말레이시아 출신의 남자들은 쌉쌀한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유튜브를 할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라고 말했습니다. 친구로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공학 유학생으로 한국 땅을 밟은 그들은 영 지지부진한 성적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지도 못할 처지에 놓여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만약 국가 장학금을 받지 못한다면 조선소나 생산직 일자리라도 얻어야 할 것 같다는 그들의 문제는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해답이 없다는 사실이 명백히 보이는 그런 문제였다. 

“죽 쑨 표정이었는데도 불평 한마디 못 하더군요. 어찌나 미안하던지…….”

결국, 술값은 버저비터가 모두 냈다. 얼큰하게 취한 몸을 이끌고 술집을 나서며 그는 그만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서울을 넘어 경기도와 인천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봐야겠다고 넋두리했다. 잘만 풀리면 지방 정부의 지원도 기대해 볼 수 않겠냐며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그러고는 아주 기운차게 그날 먹은 걸 모두 게워 냈다.

다음 날 버저비터는 고프로와 휴대전화, 외장 메모리를 챙겨 인천행 지하철 1호선에 올랐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해변을 찾아볼 계획이었다. 인천은 해안 도시니까 잘 알려진 월미도나 을왕리 말고도 숨겨진 아름다운 해변이 하나쯤은 있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그럼직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그는 바다가 있는 방향으로 가는 마을버스에 적당히 올라탔을 것이고, 그때가 전날 새벽 3시까지 마신 술이 모든 것을 바꾼 시점이었을 것이다. 버스는 창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달렸다. 버저비터는 창에 기대 깜빡 잠들어 버렸다.

버스 기사는 코가 막혀 연신 재채기를 하면서도 도통 잠에서 깨지 않던 동남아시아 출신의 남성을 기억했다. 코가 막히고 아리기로는 버스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코를 풀면 끔찍한 악취가 덮쳐 오리라는 걸 알았기에 버스 기사는 비상용 마스크 한 장에 의지해 묵묵히 버스를 몰았다.

“원래 거기까지는 운행하지 않는 게 불문율인데 말이죠. 저도 초행길이어서 지도를 켜 놓고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늦게나마 눈을 떠서 어찌나 다행스럽던지…….”

깨어난 버저비터는 인상을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걸 본 버스 기사는 그에게 어서 내리라고 소리쳤다. 사람이 있어 오기는 했지만 원래 여기까지는 운행하지 않는 버스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버스 기사는 그에게 함께 돌아갈지 정류장이 아니지만 여기서 내릴 건지 물었다. 버저비터는 눈을 껌뻑이며 그냥 내리겠다고 했다. 버스 기사는 그를 내려놓고 버스를 돌려 이미 조금 어긋나 버린 배차 시간표를 맞추기 위해 힘차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구글 맵스 데이터에 따르면 버저비터가 하차한 위치는 사월마을이라는 곳을 지나 쓰레기 매립지와 공장 사이 어딘가였다. 바다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으므로 버저비터는 악취를 참으며 걸었을 것이다. 그는 악취에 뒤늦게 놀랐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음식물 쓰레기 냄새 같더니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엔 소화 불량인 사람의 변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했고, 간간이 코가 아리도록 매운 냄새도 섞여 들었을 것이다. 만약 회색 바다와 검은 해변이 조금만 더 멀었더라면 그는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중간중간 멈추기는 했어도 성인 남성의 평균 보행 속도에 충실하게 맞춰 해변으로 향했다.

해변을 본 순간, 졸음과 냄새 때문에 폭우 속 전면 유리처럼 뿌옇던 버저비터의 정신에 와이퍼가 작동했을 것이다. 흑요석같이 아름다운 검은 해변 앞에서 악취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쪼그려 앉아 모래를 파내 보았다. 고왔다. 여수나 제주에 있는 검은 모래 해변도 이곳처럼 새까맣고 부드럽지는 않다. 블랙번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것이다. 그건 조금이라도 더 뽀얀 피부를 갖기 위해 그가 매일 밤 얼굴에 발라 대던 숯 팩의 제품명이었다.

버저비터는 15분 동안 악취도 잊고 해변에 완전히 매혹되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카메라를 들이댔다.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대충 아무 앵글로 찍어도 영상은 숨이 멎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그는 셀프카메라 실력이 형편없었는데, 거기에서 찍은 셀카들은 프로 사진작가가 찍었다고 해도 될 만한 우아한 아우라를 풍겼다. 휴대전화도 그런 극적인 발전에 놀랐는지 연신 오류를 일으켰다.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4년도 청년예술가도약지원 사업을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